한국은 친일파 후손들이 득세하는 일들이 많은데 과거 부정하게 쌓아 올린 부를 바탕으로 대를 이어 영향력을 행사하기 때문이다.
과거에 친일파 청산을 했다면 좋았겠지만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서 그러지 못했으며 오히려 친일파들에게 높은 권력을 제공했다.
그 결과 독립을 위해서 노력했던 분들의 후손은 가난하지만 친일파 후손들은 사회의 기득권으로 부와 명예를 가진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친일파로 대표적인 인물에는 누가 있을까? 대부분 이완용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번 시간을 통해서 알아보도록 하자.
목차
1. 김덕기
김덕기뿐만 아니라 김태석, 노덕술, 유승운, 하판락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를 탄압하고 고문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일본의 편에서 독립운동가를 잡아들여 고문을 했는데 그중에서 김덕기는 반민특위에서 유일하게 사형 선고를 받았다.
이완용이 나라를 팔아먹고, 이용구는 국민을 현혹시켰다면 김덕기와 고문 경찰들은 독립을 위해 타오르는 불을 끄려고 했다.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를 체포하고 고문을 했으면 조선총독부에서는 경찰 최고의 훈장 공로 기장을 김덕기에게 수여했다고 한다.
그는 조봉암, 박헌영, 안창호를 체포한 다음 공산주의자로 몰아가서 중국에 인도하려고 했지만 실패한 이력이 존재한다.
2. 이완용
매국노, 친일파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표적인 인물로 많은 시간이 흐른 현대에 들어서도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이유는 을사오적, 정미칠적, 경술국적에 모두 포함되어 일본에 권리를 강제로 빼앗기는 계약을 추천하고 찬성했기 때문이다.
이런 노력 덕분에 한국은 일본의 보호를 받는다는 명목 아래 식민지가 되었으며 한일병합조약을 통해서 국권이 완전히 넘어가게 된다.
그는 정미 7조약, 기유각서 등 역사적인 친일 행위에 모두 참여해서 일본에 공을 인정받고 작위를 받은 대표적인 매국노가 되었다.
말년까지 부와 권력을 누리던 그의 재산은 대부분 자식들에게 상속되었으며 일부만 국가에 환수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3. 이지용
가장 악질적인 매국노로 평가받고 있지만 대중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로 이완용과 함께 을사조약을 체결했던 인물이다.
그는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로부터 뇌물을 받고 한일의정서를 체결하는 등 대한제국이 일본에 이익을 주는 협상을 진행했다.
해당 조약은 일본의 세력에 대한 제국이 포함된 것을 의미했기 때문에 일본은 한국의 땅을 군사적 목적으로 쓸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국민들의 분노를 이끄는 행동을 했던 이지용은 나라를 팔아먹은 돈으로 도박을 했으며 대부분의 재산을 탕진했다고 한다.
그래도 일본의 앞잡이 역할을 하면서 풍족한 생활을 이어갔고 사망하기 전에는 일본한테 속았다는 망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4. 윤치호
교육가, 정치가로 말할 수 있는 그는 독립협회 회장을 하기도 했지만 이후에 변절하여 조선총독부 충추원 고문으로 활동을 한다.
그가 이렇게 친일로 전향하게 된 계기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역적 취급을 받고 파벌 싸움에 지쳐 계몽을 포기했기 때문이다.
조선 민중들의 무지함과 부패한 관료의 모습을 보면서 윤치호는 독립은 어려워 보이니 차라리 식민지로 지내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공직에서 물러나고 일본에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던 그였지만 일제에 굴복하여 친일 행위를 하기 시작한다.
논란이 되는 부분은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기록이 존재한다는 것인데 추정할 뿐 확실한 증거는 없어서 인정받지 못했다.
5. 박제순
을사오적, 경술국적에 속해있는 친일파로 을사조약, 한일병합조약에 찬성을 했지만 처음에는 반대를 했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이토 히로부미가 협박성 발언을 하자 나는 잘 모르겠으니 그냥 마음대로 하라고 말하면서 도장을 찍어줬다고 한다.
당시 나라에 대한 충성심과 신의가 있던 사람들은 스스로 목숨을 버리면서 절의를 지켰지만 그는 그러지 못하고 일본에 끌려다녔다.
하지만 일본으로부터 한일병합에 대한 막대한 대가를 받고는 총독부 자문기관의 고문으로 일하면서 일본을 위한 친일 행위를 한다.
놀라운 점은 그의 친손자 박승유는 독립운동을 하면서 할아버지는 왜 자결하지 않고 후손들을 욕되게 하냐는 말을 남겼다는 점이다.
6. 송병준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 활동하면서 이완용과 권력 다툼을 했던 인물로 강화도 조약 수행원으로 일하면서 친일 행보를 시작했다.
그는 러일전쟁이 발생하자 본격적으로 친일파로 활동하기 시작했는데 이용구와 함께 일진회를 만들어서 본격적인 매국을 한다.
그는 일본의 식민 통치를 위해 한일합방이 필요하다고 말했으며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병 활동을 탄압했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서 싸운 의병들은 일본군보다 일진회를 더 싫어했다고 하니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나라를 팔아먹고, 의병을 탄압하기 위한 지원금을 받으면서 부를 축척한 그는 애국을 위해 노력한 사람들의 재산을 빼앗기도 했다.
7. 윤덕영
이완용이 일본의 앞잡이 얼굴마담 역할을 했다면 윤덕영은 이름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악랄한 매국노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는 한일병합조약에 찬성한 경술국적에 포함된 인물로 사실상 해당 문서에 도장을 찍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완용의 경우 고종에게 일주일간 인사를 하러 가면서 한일병합조약을 권해지만 윤덕영은 고종의 치부를 드러내고 협박을 했다.
얼마나 악랄하게 권력을 유지하고 재산을 불렸는지 당시 친일파 중에서 가장 재산이 많았던 사람을 꼽으면 윤덕영이었다고 한다.
그의 아내 역시 일본의 전쟁 자금을 지원하기 위한 단체를 운영하기도 했는데 그들은 말년부터 사치를 부려 가세가 기울게 된다.
8. 민영휘
일제강점기 시절 가장 부유했던 가문의 한 사람으로 고려 말부터 많은 인물을 배출했던 여흥 민씨 가문의 이미지를 나쁘게 만들었다.
그는 명성황후의 친척으로 많은 권력을 누렸으나 본인의 이익을 위해서 친일파로 변절하고 나라를 팔아먹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한다.
기본적으로 자신의 이익에만 신경을 썼기 때문에 평안도 관찰사로 일하던 시기에도 백성들의 재산을 빼앗아 문제가 되기도 했다.
자신의 권력과 이익을 위해서 친일파로 활동했던 민영휘는 말년에 자신의 이미지를 바꾸기 위해서 기부를 하기도 했다.
대표로 휘문중학교, 휘문고등학교의 전신인 휘문의숙을 설립한 것인데 그가 부를 축적한 내용을 보면 용서받을 수 없는 인물이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1,006인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을 공개했는데 그중에서 72명은 4가지 이상의 매국행위를 했다고 합니다.
그들의 후손들은 죄가 없다고 말하지만 일본의 편에서 친일행위를 하는 정치인을 보면 그 밥에 그 나물이라는 말이 떠오르네요